화산검신 - 人을 그려내다.

 



1. 人은 人을 그리워 한다.

 

날씨가 추울 수록, 세상 살기 팍팍할 수록, 사람에게 상처 받을 수록 그리워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다. 뜨듯한 아랫목 속, 훈훈한 차 한 잔을 들고 따듯한 사람들의 향기가 묻어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과 웃음을 함께 한다.  그리고 그렇게 푹 쉬고 나면 끙~ 하면서 일어나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방송가이던 출판계던, '인정'  '소박함'  '솔직함'을 중요한 이미지로 잡은 작품들이 많아지고 있다.  <1박 2일>, <남자의 자격>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그러하고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소설이 뜨는 것이 그러하고, 강하고 확신에 찬 슈퍼맨보다는 고뇌하고 허점 있는 스파이더 맨 같은 주인공이 은막에서 많이 보이는 상황도 그러하다.  이제 대세는 '인간다움' 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화려하게 꾸민 마돈나 혹은 고민 걱정 없어보이는 슈퍼맨을 원치 않는다.

 

이러한 양상은 장르 문학에서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서제> <어게인&어게인> <니바론의 금서> <귀환: 리턴> <화공도담> <싸우는 사람들> 등 액션과 반전 보다는 인정과 사랑, 환상성, 우정 등 인간적 가치를 더욱 강조한 작품들이 속속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독자의 환호를 받고 있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양상은 무협지도 피해갈 수 없어서, 강하고 묵직한 필체를 자랑하던 남성작가들의 아성에도 감성적 터치가 점차 필요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역동적인 액션 뿐 아니라 서정적인 묘사와 감동적인 낭만성이 절묘하게 조화되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화산검신> 이라는 '정통감성무협'이 나타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2. 人은 化를 이루고자 한다.

 

이 글은 정통 무협 소설의 단단한 뼈대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부모처럼 따르던 사부의 유지를 이어 운매원에 틀어박혀 오지검만을 익히는 연과. 동기나 친구들에게서 스스로 고립된 생활을 고집하던 그는,  후배인 공손조량과 진가위의 다툼을 조정하다가 여량공을 익힌 것이 들통난다. 그 뒤로 그는 대청봉 꼭대기에서 7년간 유배를 당한다. 유배지에서 기연을 얻은 연과는 화산에서 파문된 전적이 있는 마암대주의 침공을 막아내고, 그 과정에서 상처입은 진가위를 구하기 위해 청관괴망과도 싸운다. 청관 괴망에 의해 죽기 직전에, 운매원 시절부터 돌봐왔던 백원 덕분에 공청석유를 얻게 된다. 여러 기연과 도움으로 자토와 석검, 무명비록에 얽힌 사연을 밝혀낸 연과는 마침내 오지, 구엽, 일주, 여량공을 크게 성취해내고 대청봉을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장문을 이어받은 무진자가 그에게 비무대회에 참여할 것을 권하는 장면으로 2권이 마감된다.

 

내용을 더 짧게 요약해보자면, 우직한 천재인 연과가 점차 성장해내가는 영웅의 일대기 서장 부분 처럼 보인다. 이런 구조는 너무 익숙해서 기시감마저 들 수 있다. One Top에 영웅적 능력을 가진 주인공들을 그린 글들이 보통 가지는 고질병이랄까. 그러나 감성적인 여러 장치들이(전통적인 무협에서 없었던 매우 새로운) 그런 단점을 감싸주고 있다. 자세히 말하자면 다채롭게 빛나는 주변 인물들의 따스한 사연과 섬세한 심리묘사, 담담하게 그려낸 장면묘사가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이 영웅 이야기를 승화시키고 있다. 임예령, 공손조량, 회계진인, 선진자, 명진자, 백원 등 많은 인물들이 색거울처럼 연과의 여러 면모를 저마다의 방법으로 반영하고, 자신의 사연과 조화시켜 나가기에 연과는 단순한 영웅이 아니라 화산을 사랑하는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커다란 한 송이의 모란은 지겨워질 수 있지만, 여러 꽃과 어우러지면 언제나 즐길 수 있는 이치와 같다.

 

 

3. 人은 情을 그려낸다.

 

이 글에 나타난 '사람'들은 각자의 향기가 있다. 연과는 신념이 강하면서도 정이 많다. 회강 장문인은 냉철해 보이나 깊은 포용력이 있다. 회계 진인은 일처리에 강하면서도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린다. 무진 장문 후계는 색이 옅지만 넉넉한 도량이 있는 듯하다. 선인자는 자유분방하고 쾌활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직하다. 명진자는 탈속하고 고집 세지만, 다정한 사람이다. 임예연은 명랑하지만 연과 앞에서는 수줍어한다. 진가위는 오만하고 솔직하지 못하지만, 한 번 정을 주면 거두지 않는 고집이 있다. 공손조량은 도도하고 치기 있지만, 스스로 성숙할 줄 알며 깨달은 바를 외면하지 않는 강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

 

작가가 그려낸 이 다양한 향기의 사람들. 그들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해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화산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명진자가 백매를 포기 하지 않는 것도, 전장에서마두와 공멸한 것도 화산에 대한정 때문이었다. 연과가 파문의 위험을 무릅쓰고 마암대주의 위협에 본산을 지킨 것도 화산을 사랑했기에 가능했다. 공손조량의 변화와 진가위의 정진도, 연과의 조언이 시발점이겠으나 화산에 대한 애정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스승을 잃고 오지검만을 익혀 겉돌던 연과를 보다듬은 회계진인의 배려나, 연과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회강 진인의 반응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화산의 품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정말 사랑해서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애정을 바탕으로, 연과는 대청봉의꼭대기에서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백원의 인도를 받아 청관괴망을 물리치고 공청석유를 취하고, 백계진인의 동굴에서 석검과 비록을 얻어 백매의 전승을 이어낸 것이다. 백매의 전승을 이은 그는 화산에 그 결실을 돌려주고자 한다. 그 개인의 마음이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화산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런 여러 애정이 마치 물길처럼 흘러들어 이 작품을 따듯한 빛처럼 밝히고, 읽는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주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이런 감성적인 요소는  강렬한 필치의 기존 무협과는 궤를 달리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전통성을 보드랍게 감싸안고 있다.

 

 

4. 人은 化를 이루어 情과 慕을 낳는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느 길. 덜컹거리는 얕은 진동을 느끼며 이 책을 덮었을 때 버스 광고판에 모 은행의 광고를 보았다.

'같이의 가치'

그 짧은 문구가 마치 연과의 속삭임 같아서 조금 웃었다.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화산과 연과가 나도 점점 그리워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