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많은 이들이 이 작품을 보고 이전의 촌부와는 달라졌다고 한다. 물론 달라졌다. 주제에 접근하는 이야기의 방식이. 그러나 이 감상은 전작과의 차이점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깔려있는 전작과의 연속성, 즉 촌부가 집중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살펴보려는 시도가 될 것이다. 이제 겨우 2권까지 진행되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엿보이는 부분을 토대로 감상을 진행한다.


1.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세상은 어딘가 잘못 되어있는 것 같다. 1850년 미국, 자신들을 노예로 부리려고 추격하는 백인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엄마인 자신의 손으로 자기의 자식을 목을 베 죽인 다음 자살하려던 흑인 여성이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2010년 한국, 자신의 소유인 갤러리의 전시 행사를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개인적 인맥을 불법적으로 활용하여 억대의 예산을 지원받은 이가 있는 반면에, 방학 중 결식아동들의 식사를 지원하는 데 쓰일 예산은 무참하게 삭감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잘못 되었다, 라고 여기면서도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마저도 힘에 부치니까. 그런데 간혹 있다. 이러한 문제를 도무지 참고 견뎌낼 수 없는 소수의 혁명가들이. 그들은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세상을 변혁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상象을 가지고 있다. 사회가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고, 그러므로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른 바 복잡한 인간 사회의 구조를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옳음의 원칙을 품고 세상을 바꾸려는 혁명가들이 좌초하는 한계 지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문자 그대로 현실적인 역량의 문제이다. 대부분의 경우 혁명가들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회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준에 비하여 턱없이 부족하다. 가령 아직도 흑인을 차별하는 미국 백인 상류층의 결속을 분쇄하기 위하여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자원은 거의 언제나 그것을 수행하고자 하는 인권단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적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혁명가들의 손은 극히 드문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텅 비어있었다.


그러나 이렇듯 냉엄한 현실적 문제도 또 다른 한계지점에 비하면 차라리 가볍다. 혁명가들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세상이 잘못되었다.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왜 하필 ‘이렇게’ 바꾸어야 하는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옳다고 믿는 신념이 필연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다른 모든 신념에 우선하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보장해줄 근거가 그 자체로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세계의 우연성 문제이고, 죽음의 문제이고,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불운의 문제이다. 죽음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간다. 세상에 정의가 있다면 자식의 목을 베도록 만든 저 악랄한 작자들에게 죽음이, 재앙이 방문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전두환은 아직도 80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윤기가 흐르는 얼굴을 하고 건강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가? 왜 천벌은 그와 같은 악인을 비껴가는가?


사마귀가 나비를 잡아먹는데 우리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듯, 사람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에 세계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세계 속에서 인간은 다른 여타의 생물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옳고 그름은 자연세계의 입장에서는 그저 허상에 불과할 따름이다.


바로 이러한 우연성 때문에 혁명가들이 좌절하게 된다. 그들이 믿는 바를 세계가 옳다고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인지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찾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러한 불확실성을 안고 그들은 믿는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저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끝끝내 부모가 자식의 목을 베는 사회를 긍정할 수 없으니까.


2.


“허어, 세상천지에 아름다운 것이 있던가?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저 살고자했을 청년의 글귀에 가문을 잃어야 했네. 그도 원치 않고 나도 원치 않는 일이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어. 이것도 아름다운 것인가? 

도는 지극하고 높은 이치지만, 그것도 천지만물에 소용되지 않네. 여우는 닭을 잡아먹고 사마귀는 나비를 잡아먹는 것이 곧 자연의 이치, 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죽여야 하는 것일세. 이것이 아름답던가?“


전작 <화공도담>의 한 구절이다. 이것이 좌절한 혁명가가 비뚤어졌을 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누구도 그리 크게 잘못하지는 않았는데 상황은 절망적일 때, 비참은 만연한데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죄인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혁명가는 그 화살을 세상 그 자체에 돌리는 경우가 있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러니 세상 전부를 뜯어고쳐야 한다고. 십중팔구는 아집과 독선으로 인하여 오히려 또 다른 혼란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한 사람의 머리와 삶으로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세상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 저 구절의 화자는 한재선과 같은 이를 끔찍이 싫어할 것이다. 세상의 이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도 없고, 그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인 게으름뱅이가 천방지축 날뛰는 행동에 세계의 운명이 걸려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처럼 변덕스런 하늘을 더욱 원망하게 되고, 하늘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자신과 같이 분명한 신념과 세계를 변혁할 힘을 가진 이조차도 쉽게 만들 수 없는 거대한 변화가, 우습게도 게으름뱅이 서생의 도주행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 역시 세계의 우연성에서 비롯되는 한 가지 가능성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마감이 싫어 도망친 한재선 탓에 신교와 무림맹 양 진영을 뒤흔들던 흑막의 꼬리가 드러나게 되었다. 순전한 우연에 우연이 겹쳐 불필요한 혈겁을 막을 수 있게 된다면 그처럼 기적 같은 일이 또 있을까. 한재선의 이기적인 행동 탓에 자칫 삶이 불행해질 뻔 했던 수많은 이들이 구제받을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연성의 역설이다. 우리가 세상을 부정하지 말아야할 하나의 이유가 된다.


분명히 세상에는 추하고 저열한 사건과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이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필연적으로 옳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그저 모든 것이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우연적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하여 섣불리 그 우연함에 질려 아름다움 자체를 부정하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추함이 압도적인 세상이라고 해서, 그것을 무턱대고 파괴하려는 욕망은 추함과 아름다움 모두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3.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식의 목을 베도록 강요하는 사회를 긍정할 수는 없다. 그것을 교정하기 위한 시도가 어쩌면 모든 것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겸허하게 세계의 우연성을 인정하고 신념의 불완전함을 수긍해야 하지만, 동시에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노력과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잘못을 교정할 수 있다. 유토피아를 바라는 것은 오류에 빠질 공산이 크지만, 사람들이 조금만 더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회를 바라는 것은 가능하다. 어려움에 처한 눈앞의 사람에게 공감하여 그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고, 그 자신도 타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감정에 좀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훈련이 가능한 사회 구조 속에서 적어도 자식의 목을 베어야 하는 불의한 상황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혁명가는 그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세상을 바꿔나가고자 노력하면 된다. 그러나 그 신념이 완전하다는 오만을 버리고, 그것이 온전한 모습으로 일대의 커다란, 전면적인 혁명으로서 실현될 수 있다고 맹신해서도 안 된다.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주목하고, 다만 그 신념에 따라 자신과 자신 주변의 사람들부터 조금씩 조금씩 더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데 보탬이 되도록 꾸준한 실천을 경주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적어도 정치적 평등의 권리를 확대하는데 있어서 인류는 ‘진보’해왔다. 아무도 이제는 노예제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한국에서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 노골적으로 시비를 거는 이는 없다. 이 변화는 한 세대만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진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진보의 의미를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인간이 어떻게 살든지 전연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지만, 분명히 인간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나름의 질서를 구축해낸다. 근본적인 자연세계 차원에서의 우연성의 이치를 인정하면서도, 인간 사회의 차원에서 정의와 옳음의 원칙을 세워나가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몇몇 혁명가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극적으로 단번에 성취되지는 않는다. 이상만을 바라보는 인간은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있어 정작 자신 옆의 소중한 몇 몇 사람들조차도 살피지 못한다. 인간이 타고난 공감능력을 고양시켜 서로에게 힘든 삶의 위로가 되어줄 수 있는 사회제도적 토대를 하나하나 만들어나가는 것, 본인의 삶 속에서 옆에 있는 사람들부터 보듬어 주는 실천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우연성의 문제는 사람들을 힘겹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을 기쁘게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전의 불의한 사회보다 더욱 커질 것이다. 불의한 사회에서 느닷없이 찾아오는 병마는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욱 큰 불행으로 찾아오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필요한 만큼의 의료서비스를 받는 사회에서는 한결 덜한 불행이 될 것이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원은 같고, 이것이 정확히 세상의 우연함이다. 우리는 추함을 인정하되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더 많이 표현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한재선을 중심으로 한 한 편의 활극은 바로 이런 겸손한 의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전작의 주인공들은 주변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자신의 따뜻한 마음을 지켜나갈 수 있었고, 그것이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적자는 세상을 단번에 바꾸어 내려는 비뚤어진 혁명가였다.


주어진 재능부터 삼보기연, 도주 등 한재선과 그를 둘러싼 모든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결망을 통해 촌부는 다시 한 번 오만하고 왜곡된 혁명가들을 부정한다. ‘세상의 우연성을 인정해라, 그렇다고 해서 정의의 문제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연성의 이치 앞에서 스스로의 무력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시야 밖에 있었던 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다.’ 라고 말하려는 듯 하다.


4.


이 활극은 단순한 이야기로만 봐도 재미있다. 그만큼 촌부의 글솜씨가 탁월하다는 의미가 된다. 어딜 가나 한 명씩은 꼭 있는, 별 것 아닌 이야기도 참 맛깔나게 잘 풀어내는 그런 사람의 재담처럼, 별 생각 없이 봐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는 그런 작품이다. 아마도 이번 작품을 완결낼 때 즈음에는, 작가로써 한 단계 성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그저 운 좋은 게으름뱅이에 불과한 한재선이 어떻게 변하게 될 지 기대된다.